보시는 기독교의 구제나 헌금에 해당하는 불교 용어입니다. 불교에서 보시 중에 최고의 보시를 ‘무주상 보시’라고 합니다. ‘무주상 보시’가 가치 있고 귀한 것은 무주상 보시를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한번은 등산하면서 유명 사찰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절 한 켠에 많은 건축자재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 중에 수천장의 기와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기와를 한 장 들어 보니, 거기에는 기증자의 이름과 소원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몇 장을 들어 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부처님 오신 날’의 대표적인 장식인 연등도 본적이 있는데,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보시한 이와 그 가족들의 이름, 그리고 소원이 예외없이 적혀 있었습니다.
유대교 랍비들은 ‘주는 사람은 누구에게 주는 지 모르고, 받는 사람은 누가 준 것인지 모를 때’, 그것이 최고의 구제라고 했습니다. 그래야만 주는 사람도 조금이라도 되돌려 받거나 혹 인사라도 받을 기대를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받는 사람도 돼 갚아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않고 마음 편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랍비들은 받는 사람의 입장과 자존감을 고려하지 않는 구제는 바른 구제라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종교를 넘어서 불교의 무주상 보시나 유대 랍비들이 말하는 바른 구제를 하는 경우는 참 드뭅니다. 받는 사람들의 입장까지 고려한 구제는 참 흔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 보면 불교인이나 기독교인이나 종교는 달라도 기본적인 인간의 심성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오랜 세월 남 몰래 했던 선행이 뒤 늦게 알려져 화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다른 사람들에 주는 감동은 배가 됩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고넬료나 다비다라고도 불리는 도르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넬료는 로마군 백부장이었는데, 이례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선을 행합니다. 그의 선행은 시간이 지나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래서 감동은 더욱더 컸습니다. 욥바 출신의 도르가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도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도루가가 만들어 준 겉옷과 속옷을 내 보이며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르가의 죽음을 더 안타까워했습니다. 결국 베드로가 베푼 기적을 통해 도르가는 다시 살아가게 되고 계속해서 숨은 선행을 합니다. 그로 인해 복음의 가치가 세상에 더 밝히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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