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becoming이라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만큼의 돈을 가지면 행복할 것 같고, 원하는 지위나 명예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해지고, 자녀가 잘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재를 희생합니다. 허리 띠를 졸라메고 이를 악물고 목표를 향해 갑니다. 그런데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고, 결혼을 하면 행복할 것 같은데, 막상 그것이 현실이 되면 그 행복은 생각처럼 오래가지 않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걱정거리 때문에 근심하게 되고 또 다시 불분명한 행복을 위해 또 허리 띠를 졸라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삶이 피곤합니다. 행복은 나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맙니다.
행복은 becoming이 아니라 being입니다. 지금 주어진 삶의 조건에 행복이 있습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가 아니라, ‘매일 웃는 자’가 승자입니다. 최후에 한 번 크게 웃기 위해 오늘 이를 악무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최후에 한 번 크게 웃을 일이 있을 지 없을 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주어진 삶의 여건에서 감사할 일, 행복의 조건을 찾으라는 겁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참 행복합니다. 건강한 몸으로 새로운 한 날을 시작할 수 있어 감사하고,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고, 걸을 수 있어서 행복하고,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하기 시작하면 감사는 끝이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매일이 새롭고 행복합니다.
자신을 실제보다 더 크게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being이 아니라, becoming에 집착합니다. being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더 부자여야하고 사회적으로도 더 높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현재의 자기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현재의 자기를 싫어하고, 자신이 설정해 놓은 현재 보다 훨씬 나은 막연하고 불분명한 미래의 자기에게 집착합니다. 그런 사람은 being에서 감사의 조건도 행복의 이유도 찾지 못합니다. 현재는 늘 불만족스럽고 참고 견디어 내야할 대상일 뿐입니다. 행복은 being에 있습니다. 주어진 삶의 여건에서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은 오늘도 웃고 내일도 웃을 수 있습니다. 최후에 한번 크게 웃는 사람이 승자가 아니라, 매일 웃는 사람이 승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