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을 보내며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되는 단어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는 사순절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에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외식적인 종교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화석화된 종교 행위가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주 미미합니다. 그저 종교행위에 참여했다는 정도의 의미 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정신이 삶으로 나타나도록 섬김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십자가의 정신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우리 속에서 엄청난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정신 그 자체는 이기심과 교만이라는 원죄의 흔적을 갖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의 이익 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추구하고, 남 위에 군림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섬기는 것은 힘듭니다. 왠지 패배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하다가는 금방 본래의 이기적인 모습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평생 예수 믿으면서도 이타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무능한 것 같고 패배한 것 같고 부끄러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오히려 유능한 것이고 승리한 것이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안에 구원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머릿속에만 있는 십자가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삶으로 나타날 때, 하나님의 구원을 실제로 삶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낮추고 섬길 때 그 가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교회 지체들이 서로 낮아져 상대를 섬길 때,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평화가 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정신이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꾸준한 훈련을 통해 이기심과 교만이라는 죄성을 극복할 때, 십자가의 정신은 삶으로 조금씩 나타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