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정직하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 많을 때 더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꽤 그럴듯해 보였지만,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숨기고 싶은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로 그들의 폐부를 찌르셨습니다. 흠하나 보이지 않는 하얗고 깨끗한 회로 두껍게 칠해 놓았지만, 그 속에는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포장만 보았지만, 예수님은 포장지 이면을 보셨습니다. 그럴듯한 포장은 다른 사람들의 눈만 가린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 자신들의 눈도 속였습니다. 그래서 진리 앞에서 자신들의 정식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의미없는 외식으로 자신들을 속이고 남을 속일 뿐이었습니다.
중세기 교회도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4세기 히에로니무스가 번역한 라틴어 성경 불가타역외에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4세기 영국의 존 위클리프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로 그의 무덤을 파헤쳐 불로 태우고 뼈를 갈아 강물에 뿌렸습니다. 또 보헤미아의 얀 후스는 당시 교회가 십자군을 모집하면서 병사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화형시켰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교회가 거룩한 명분을 내세워 속에 있는 탐욕을 가리려 할 때, 교회는 가장 교회답지 못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냈습니다.
정치인들은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죄성이 견제 받지 않고 통제 받지 않으면 사람은 누구나 괴물이 되고, 그 어떤 일도 합니다. 독일의 히틀러에게 통제 받지 않은 권력이 주어졌을 때,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하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도 결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교회는 ‘개혁의 주체이며 개혁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500년 전 뜨거운 열정으로 교회를 개혁했던 개혁자들처럼 교회는 항상 자신을 개혁해 가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교회가 진리 앞에 정직할 수 있고, 세상을 개혁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스스로 개혁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다움을 상실할 뿐 아니라,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맛잃은 소금으로 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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