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고유합니다. 모양도 크기도 존재하는 이유도 역할도 다 고유합니다. 책은 책의 역할을 위해 존재하고 시계는 시계의 역할을 위해 존재합니다. 책을 향해 왜 시계의 역할을 하지 못하느냐? 고 타박하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책은 책의 역할을 할 때 책다운 것이고 사진은 사진의 역할을 할 때 소중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75억의 인구 중에 같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다 고유합니다. 생김새도 다르고 성품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세계관도 다릅니다. 좋아하는 것이 다르고, 잘하는 것도 다르고, 못하는 것도 다릅니다.
바울과 아볼로가 다른 것은 자연스런 것입니다. 바울은 헬라철학에 능하고 유대 율법에 능통한 당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또 복음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달변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좀 지루할 수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아볼료는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고, 수사학에 능한데다 타고난 달변가였습니다. 그래서 아볼로의 말은 언제나 논리적이고 명쾌했습니다. 바울은 바울의 특성이 있고, 아볼료는 아볼료의 고유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울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아볼로는 아볼로로 살면 됩니다. 바울이 자신의 특성을 숨기고 아볼료의 흉내를 낸다거나 아볼료가 바울인체 하며 사는 것은 낭비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바울과 아볼료가 갖고 있는 특성이 고린도교회에 파벌이 생긴 이유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아볼로처럼 달변이 아니라고 타박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가 바울처럼 학문적인 깊이가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네모를 향해 왜 세모가 아니냐? 고 탓하는 것과 같습니다. 솜을 향해 왜 송곳처럼 부드럽지 않냐?고 탓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모는 세모대로, 솜은 솜대로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다"는 말로 다름을 틀림으로 오해하며 분열을 일으킨 고린도교회를 책망합니다. 모든 존재가 고유하지 않고 획일적이라면 세상을 돌아가지 않은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고유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