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참 좋은 아침입니다!!
본문은 사면초가에 빠진 시인이 하나님께 바치는 시입니다. 아마도 시인은 악한 자의 음모에 걸려들어서 망한 것 같고 거기다가 중병까지 얻어서 활동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으로 보입니다. 몸이라도 좀 성해도 움직여서 밥벌이라도 해보겠는데 할 수가 없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시인은 다른 사람들의 악담과 친구의 배신으로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인은 이 고통이 심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련이기 때문에 자신이 회복될 것을 믿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심판과 시련의 차이입니다. 심판은 고통 받고 망하는 그 자체로 끝이지만, 시련은 반드시 회복되게 되어 있고 회복될 때에는 더 큰 은혜와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빈약한 자'란 사면초가의 어려움에 빠져 있는 시인 자신을 말합니다. 그리고 ‘권고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뜻인에, 그런 어려움에 빠진 시인과 함께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면초가의 상황이 되면, 신앙이 없는 사람과 그리스도인들은 길이 갈라집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을 고립시킵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함께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주변에 위해서 기도해 주고 함께해 줄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들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들을 통해 영적으로 육체으로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시련은 반드시 끝이 있고 끝난 후에는 반드시 회복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지금 시인은 육체의 병까지 얻어 병상에 누워있습니다. 병을 얻으면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사람들의 발길도 끊어지기 때문에 고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다가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큰 두려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자리를 다시 고쳐 펴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병상을 치우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병에서 건져 주셔서 다시는 그 병상을 사용할 일이 없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치실 때에는 정말 살 소망이 다 끊어질 정도로 무섭게 치시지만, 회복시키실 때에는 또 놀랍게 회복시켜 주셔서 다시는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그 좋은 예가 욥입니다. 욥의 고난도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시련이었던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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