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칼럼

2022년 6월 12일 - 형통의 기준

JVChurch 2022. 6. 13. 09:16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QT로 많이 알려진 분입니다. 그 분은 대학 다닐 때부터 QT를 시작하셔서 지금까지 40년이 넘도록 아침은 안먹어도 QT는 한다는 분입니다. QT에 관련된 강의가 있을 때면 제법 강사로 불려다닙니다.  그 분은 자신의 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입버릇 처럼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비결이 다름 아닌 QT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 분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저분의 삶이 형통한 삶인가? 라는 의문을 들곤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형통하다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특별히 목회적으로 성공한 것도 아니고, 가정적으로 유복해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형통의 근거가 무엇이기에 스스로 형통한 사람이라고 하시는 좀 궁금했습니다. 

 

지난 주에 선교사님 한 분을 몇 시간 섬기면서 형통하다는 말의 의미를 좀 알 것 같았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60을 갓 넘기신 분인데 건강이 좋지 않으셨습ㄴ다. 조금만 걸어도 얼굴에 피곤기가 역력했습니다. 처음 뉴욕을 방문하신 분이고 또 언제 이곳에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저로서는 가능하면 여러 곳을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걸음을 많이 못 걸으시니 도무지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냥 멀리서 보고 이동하기를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좀 가까이 가서 보면 훨씬 더 낫고 사진도 더 멋지게 찍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 없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 분과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것은 여건과 상황을 초월해서 하나님 앞에서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남다르다는 것과 하나님을 참 많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결국 그것이 형통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도 모르게 세속적인 형통의 기준을 갖고 살면서 그 기준에 맞는 형통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타박하며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형통은 내가 원하지 않는 여건과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믿는 사람은 물론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좋아한다는 다윗은 그야말로 형통의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따지고 보면 다윗도 원하는 대로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삶에도 원하지 않는 일, 그래서 가슴아프고 하나님 앞에서 울어야 했던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흔들림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기에 그를 형통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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