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있을 때, 제일 힘들었던 것은 100km 행군이었습니다. 오전 8시에 숙영지를 떠나 다음 날 아침 8시에 주둔지에 도착하는 일정입니다. 50분 걷고 10분 쉬기를 반복하며 24시간을 걷습니다. 물론 식사 시간도 있고, 그 때는 좀 휴식 시간이 깁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은 새벽 2시에서 4시경입니다. 졸음이 쏟아지고 다리가 풀립니다. 메고 있는 군장과 총의 무게에 짓눌려 저절로 허리가 숙여집니다. 고통 때문에 저절로 인상이 써지고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밝게 웃으며 다른 동료들에게 힘을 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낙오 직전에 있는 동료의 총까지 대신 메주는 모습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때 부터 그 친구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기뻐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실 웃을 일보다는 짜증내고 화 낼일이 더 많습니다. 짜증내고 화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럴 때, 오히려 기뻐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주도적으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유우머집’이라는 다양하 종류의 책이 있을 정도로 유대인의 유우머는 유명합니다. 유대인들의 유우머는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는 형통할 때, 즉 웃을 만할 때,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울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우머를 통해 주어진 상황을 다르게 생각하고 대처하고 극복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을 추대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 사람이 주님을 위해 얼마나 수고했나?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나?가 아니라, 얼마나 기뻐하는 사람이었나? 라고 합니다. 비록 순교자라 할지라도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성인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기뻐하는 것을 성숙의 척도로 보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것이 성숙의 척도라는 것이 처음에는 미심쩍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동의가 됩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짜증을 내거나 기뻐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짜증내고 화내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키면 시켰지 좋아지게 할 수없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상황에 짓눌리지 않고 상황을 주도할 수 있게 합니다. 고통 이면의 다른 것을 보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선택하는 2024년의 우리 공동체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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