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칼럼 181

또 다른 시작을 위하여

해마다 이 맘때가 되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월이 참 빠르다” “참 다사다난한 한해 였다” 어렸을 때는 시간이 참 안갔는데, 요즘은 왜 이렇게 빠른지 정말 쏜살 같습니다. 한 해를 시작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 새 한 해의 끝에 서 있습니다. 늘 이 맘 때면 여러가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스치는 많은 생각 중에 가장 큰 것은 감사입니다. 부족했지만 맡겨주신 소임을 다했다는 것이 감사합니다. 불과 몇 시간 후면 2024년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시작을 앞에 두고 꼭 필요한 것은 감사입니다. 감사는 과거를 긍정하게 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무엇보다도 살아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건강하다는 것이 감사하고 여전히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목양 칼럼 2023.12.31

성탄의 영광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영광’ 특별히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대단히 상반된 의미로 쓰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능력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도록 눈앞에 드러났을 때,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가령 출애굽 당시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사건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에는 정반대의 측면도 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자신을 낮추었을 때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처형되신 사건입니다. 성탄의 영광은 후자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가..

목양 칼럼 2023.12.25

대강절에 밝히는 촛불의 의미

성탄절 앞에 있는 네 번의 주일을 대강절이라 부릅니다. 대강절이라는 말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강절은 이중적 기다림의 절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강절에는 보통 푸른 색 화환에 보라색 초 세개와 분홍색 혹은 붉은색, 흰색초등 모두 다섯개의 초로 교회 강단을 장식하여 성탄의 의미를 담습니다. 대강절 초는 담고 있는 의미에 따라 켜는 순서도 다릅니다. 대강절 첫번째 주일에 켜는 초는 보라색으로 소망의 촛불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구원자 이신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대강절 두번째 주일에 또 하나의 보라색 초를 켜는데, 이것은 준비의 촛불 혹은 회개의 촛불입니다. 하나님..

목양 칼럼 2023.12.18

성경과 토마스 선교사

성서주일을 맞을 때마다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입니다. 영국 웨일즈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여 런던대학을 졸업한 토마스 선교사는 20대 초반에 중국에 선교사로 입국합니다. 그는 갓 결혼한 아내 캐롤라인 갓프리와 함께 1863년 12월 중국에서 사역을 시작했는데, 임신중이었던 캐롤라인은 이국생활에서 오는 충격과 풍토병으로 유산하고 그 다음 해 3월에 세상을 떠납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과 충격으로 절망 가운데 살아가던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가 심하다는 말을 듣고 조선선교를 꿈꾸게 됩니다. 그 후 토마스 선교사는 황해도 연안 창린도에 들어 와 두달 반을 머물며 한문성경을 사람들에게 나눠줍니다. 그렇게 전도하며 한국어를 익히게 됩니다. 중국에서 조선 입국의 기회를 ..

목양 칼럼 2023.12.12

대강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강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강절은 성탄절 전의 4주간을 말합니다. 대강절(待降節=Advent)은 대림절 혹은 강림절(降臨節) 이라고도 하는데, 대(待)의 의미는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입니다. 또 강(降) 이라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의 ‘도착’을 의미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 했습니다. 또 절(節)은 절기를 뜻합니다. 종합하면 대강절은 주님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절기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아기로 강림하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기간이며, 동시에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앗수르,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로 이어지는 수천년간..

목양 칼럼 2023.12.04

감사로 매듭짓기

동일 선상에 있는 수 많은 점들이 이어져 직선을 이루듯, 하루, 한 달, 혹은 일년이라는 많은 매듭들이 이어져 사람의 생애를 만듭니다. 그런 면에서 하루, 한 달 혹은 일년의 ‘마무리’가 시작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용두사미식으로 시작은 요란한데 마무리가 신통치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무리가 흐지부지되면 얻어지는 결과가 없습니다. 매듭을 잘 지어야 분명한 결과가 있고, 다음 매듭에도 좋은 영향을 미칩니다. 하루를 잘 매듭지으면, 그 영향이 다음 날까지 이어집니다. 한 해의 매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해의 매듭이 좋으면 다음 해의 시작도 좋습니다. 어느 덧 금년 한 해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의 매듭짓기를 생각해야할 때입니다. 어떻게 하면 한해의 매듭짓기를 잘 할 수 있을까요? 감사로 매..

목양 칼럼 2023.11.27

감사하는 습관을 만듭시다!!

100세가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집필과 강의로 대중과 소통하는 분이 있습니다. 김형석 교수입니다. 건강의 비결을 묻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감사하는 마음과 규칙적인 생활’이라고 대답합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특별하지 않은 그의 건강 비결을 들으며 ‘습관은 운명을 만든다’는 말을 실감한 적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과 규칙적인 생활이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과 오랜 생활 반복해서 자연스런 일상이 되고 습관이 되는 것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입니다. 감사에 대한 연구는 기독교의 범위를 넘은 지 오래입니다. 감사가 사람의 삶에 영향이 생각 이상으로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과 습관이 되는 것은 차이가 많습니다. 머리에 남아 있는 단순한 지..

목양 칼럼 2023.11.20

행복 관계식

행복은 수치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가령 나는 100만큼 행복하다거나 50만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역으로 100만큼 불행하다거나 50만큼 불행하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대략의 관계식으로는 표현할 수 있습니다. ‘행복=소유/욕심’입니다. 행복이라는 수치가 커지기 위해서는 분모인 욕심 보다는 분자인 소유가 커야 합니다. 아무리 소유가 늘어나도 욕심이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한다면 행복이라는 수치는 커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줄어듭니다. 단군 이래 한국 사람들이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풍요를 누린 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누리는 경제적 풍요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2023년 세계 행복 보고서 통계에 의하면 조사대상 137개국 중에 1위는 수년째 일등을 하고 있..

목양 칼럼 2023.11.13

행복의 비결은 감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기왕 사는 것 불행하게 사는 것 보다야 행복하게 사는 것이 백번 천번 좋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꿈꾸며 열심히 삽니다. 이를 악물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절제하며 현재를 희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행복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현재를 희생하며 열심히 산다고 해도 원하는 것을 꼭 얻는다는 보장이 없을 뿐 아니라, 또 원하는 것을 얻는다 해도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고 성취하는 속도 보다 욕심의 속도가 훨씬 더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그것도 자기 보다 나은 사람들과 비교하게 되고 실망하게..

목양 칼럼 2023.11.06

진리 앞에 정직하기

사람은 정직하기 어렵습니다. 특별히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이 많을 때 더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꽤 그럴듯해 보였지만,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숨기고 싶은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로 그들의 폐부를 찌르셨습니다. 흠하나 보이지 않는 하얗고 깨끗한 회로 두껍게 칠해 놓았지만, 그 속에는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포장만 보았지만, 예수님은 포장지 이면을 보셨습니다. 그럴듯한 포장은 다른 사람들의 눈만 가린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 자신들의 눈도 속였습니다. 그래서 진리 앞에서 자신들의 정식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의미없는 외식으로 자신들을 속이고 남을 속일 뿐이었습니다. 중세기 교회도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4세..

목양 칼럼 2023.10.31